기업 56.8% 비용 부담 호소 … 전력비 인센티브·요금제 개편 필요성 부각

정부가 산업경쟁력 강화와 탄소중립을 위한 녹색전환(K-GX)을 추진하고 있지만, 산업 현장의 전기화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 10곳 중 6곳 이상은 전기화 추진계획조차 세우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설비 투자비와 전력조달 비용이 기업들의 에너지 전환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으로 지목됐다.
8일 대한상공회의소가 매출액 상위 1000대 기업 가운데 307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의 전기화 현황과 정책과제 조사'에 따르면 전기화를 현재 추진하고 있는 기업은 31.9%에 그쳤다.
향후 추진하겠다는 기업도 5.2%에 불과했으며, 62.9%는 별도의 추진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전기화는 석탄·석유·가스 등 화석연료에 의존하던 산업 설비와 생산공정을 전력 기반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가스보일러를 전기 히트펌프로 교체하거나 제철소의 고로를 전기로로 전환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전기화를 핵심적인 탄소배출 감축 수단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부 역시 K-GX의 주요 실행과제로 전기화를 제시하며 산업구조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실제 전환 과정에서 체감하는 비용 부담은 상당한 수준이다.
전기화를 추진 중인 기업 가운데 56.8%는 관련 비용 부담이 크다고 응답했다.
'다소 크다'는 답변이 42.0%, '매우 크다'는 응답이 14.8%였다.
가장 큰 걸림돌은 초기 설비투자 비용이었다. 복수응답 기준으로 84.0%가 높은 초기 투자비를 부담 요인으로 꼽았다.
이어 높은 운영비 56.2%, 정책 불확실성 18.5%, 안정적인 전력공급에 대한 우려 16.4% 순이었다.
기술 부족과 전문인력 부족도 각각 12.1%, 6.8%를 차지했다.
전기화가 탄소배출 감축에 기여하더라도 전기요금이 높으면 전환 이후 기업의 생산비용이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설비 교체에 따른 투자비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전력구매 비용까지 감당해야 하는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전기화에 선뜻 나서기 어려운 구조다.
기업들이 가장 시급하게 요구한 정책도 전력비 부담 완화에 집중됐다.
전기화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정책으로 응답 기업의 66.1%가 '전력조달비용 부담을 줄이는 인센티브'를 선택했다.
요금 및 전력시장 제도 개선이 61.9%로 뒤를 이었고, 에너지정책의 예측 가능성 제고 45.0%, 기술개발 및 인력양성 23.1% 순으로 나타났다.

대한상의가 서울과학기술대 정연제 교수에게 의뢰해 작성한 '주요국의 전기화 지원사례 및 시사점' 보고서도 전력비용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교수는 화석연료를 전기로 대체하는 속도를 높이려면 기업이 부담하는 전력조달 비용을 낮추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전기요금이 높을 경우 전기화 이후 운영비가 기존 화석연료 사용 때보다 증가해 기업의 자발적인 전환을 유도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정부기금을 활용해 전력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등 주요국의 정책을 참고한 실질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실제로 주요국은 산업계의 전기화와 탈탄소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전력비용 지원책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일부 전력회사는 재생에너지 사용 기업에 할인 요금을 적용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주도 전기화 기업을 대상으로 요금 인센티브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에너지 효율이 높은 에너지집약기업에 전기요금 할증을 면제해 주고 있다.
독일은 녹색투자를 조건으로 전기요금 차액을 보조하며, 폴란드도 녹색투자 기업의 전력비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일본 역시 에너지 효율 기준을 충족한 기업이 재생에너지를 사용할 경우 관련 부과금을 감면하는 방식으로 전환을 뒷받침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내년 도입 예정인 산업용 지역별 전기요금제가 기업들의 전기화와 지방 투자 확대에 새로운 유인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조사에서 지역별 전기요금제의 비용 절감 효과를 묻는 질문에 기업의 91.8%가 긍정적인 기대를 나타냈다.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응답은 66.4%였으며, 기대 수준이 '다소 높다'는 기업은 17.9%, '매우 높다'는 기업은 7.5%였다.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응답은 8.2%에 그쳤다.
지역별 요금제 시행이 비수도권의 신규 투자와 설비 증설로 이어질 가능성도 확인됐다.
응답 기업의 49.8%는 비수도권 투자를 검토할 여지가 생길 것이라고 답했다.
투자 규모가 다소 늘어날 것이라는 응답은 11.4%,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답변은 3.3%였다.
반면 투자 확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기업은 35.5%였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한국자원경제학회장)는 “K-GX 정책이 산업 현장에서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려면 기업이 체감할 수 있는 유인책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전력시장 요금체계가 변화하는 시점인 만큼 관련 정책 간 연계를 통해 전기화와 녹색투자가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영준 대한상의 지속가능경영원장은 "기업의 전기화는 아직 초기 단계로, 지원체계를 어떻게 갖추느냐에 따라 확산 속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며 "기업이 비용 부담 때문에 전기화를 망설이지 않도록 전력조달비용을 낮추는 인센티브와 예측 가능한 요금체계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 결과는 탄소중립을 위한 산업 전환이 기업의 자발적인 투자만으로는 속도를 내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전기화는 단순한 설비 교체를 넘어 제조업의 에너지 비용과 생산 경쟁력을 좌우하는 산업 전략인 만큼, 탄소감축 목표와 기업의 비용 현실을 연결하는 정책 설계가 중요해지고 있다.
전력비용 지원과 안정적인 요금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K-GX 역시 산업 현장에서 선언적 목표에 머물 수 있다는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