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소통하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을까?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어원은 라틴어 나누다(Communicare)에서 유래했는데 화자(話者, Speaker)의 정보, 생각, 감정 등을 청자(聽者, Receiver)에게 전달하고 공유하는 상호작용(소통), 즉 제대로 나누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 언제부터인가 상호작용, 나눔은 사라지고 오로지 내 생각과 다르면 적이라는 불통의 장벽시대에 살고 있다. 말을 하는 화자는 맞다고 주장만 하고 청자는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도, 나누려 하지 않는다. 상대가 말하면 그의 생각, 감정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게 기본이고 대화의 예의인데, 이는 사라지고 내가 반박할 말을 준비하고 상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반박 주장을 한다. 이래서는 소통이 될 리 만무하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설명할 때 바탕에 그 나라의 민족성,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자나 화자나 대화의 근간에 배어있는 게 문화가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통, 정쟁을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게 조선시대 사색당쟁(四色黨爭)이다. 우리 소통문화 속에는 조선시대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4대 당쟁의 근간이 숨어있다. 굳이 임진왜란 전에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서로 다른 자기 주장 보고를 하고 상호 불신의 당쟁으로 500년 조선 왕조의 국운이 기울게 된 주요 요인이 바로 이 사색당쟁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더 아픈 사실은 그 시대 무조건 상대를 무시하는 정쟁을 일삼았고 우리끼리는 국론을 조율할 소통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추후 식민사관까지 연결되는 사색당쟁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인간을 대신하는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사색당파같은 쟁의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성형 AI 커뮤니케이션에도 사색당파가 있을까?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상대를 반대 세력이 아닌 나누는 대상인 동반자로 수용하는 소통은 불가능한 것인가?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고 반복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교훈을 진정 새겨야 하겠다.
얼마전 공연장을 찾았었다. 늘 그렇듯 모든 연주가 다 끝나고 청중들은 박수를 보내면 커튼 콜이 연주되길 바랐지만 아무리 박수를 쳐도 인사만 하고 들어갈 뿐 한동안 추가 연주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왜 그랬을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힘든 준비로 지쳤나? 지휘자가 아픈가? 앵콜곡 준비를 하지 않았나? 그러다 생각이 든 게 박수만 쳤지 브라보! 함성 같은 추임새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맞다 나라도 브라보!를 외치며 환호할 걸… 그랬으면 박수에 더해져 다른 때처럼 커튼콜이 있었을텐데… 이게 추임새의 힘이다. 박수라는 의례적 호응에 더해 입으로 말로 하는 추임새가 더 쉽게 상대에게 전해진다.
내가 오래 전 들은 이야기가 있다. 국내에서 개원해 실패한 한 의사가 미국에 이민 가서 개업을 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이다. 초창기 이민 시절 아직 대화가 용이하지 못해 환자의 아픈, 고민 이야기는 알아듣겠는데 우리나라에서처럼 설명도 잘 하지 못하고 해서 주로 들어주면서 “리얼리?”, “으흠, 원더풀!” 등의 호응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는데 추후 환자들은 돌아가 자기의 이야기를 저렇게 잘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훌륭한 의사는 처음 보았다고 칭찬하면서 입소문이 퍼져 성공을 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는 전문지식도 없이 떠드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귀담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고객의 말에 전문가가 감탄과 동조의 적절한 표현이 얼마나 상대를 기분 좋게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해 주는지 알아야 한다.
소통의 기본 자세는 상대의 입장에서 들어주고 먼저 반박하기 보다는 속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쩌면 대화를 잘하는 통찰이다.
긍정의 용어, 나누려는 마음가짐, 내 뜻과 상반되더라도 수용하려는 자세로 먼저 경청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다. 좋은 소통은 저 의사처럼 상대가 원하는 용어와 눈높이 그리고 추임새 커뮤니케이션이다.
나는 알고 상대는 모른다, 나는 맞고 상대는 틀리다는 소통의 자세로는 영원히 사색당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유명한 그림이다. 6과 9의 관점 논쟁. 6이라는 사람의 관점과 9라는 사람이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똑같은 대상이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심리 비교이다. 6은 9에게 니가 틀렸다고 말하고 거꾸로 9는 6에게 이게 어떻게 6이냐고 말한다. 요즘 우리 소통상황과 흡사하다. 상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불통의 고집만 부린다. 둘이 다른 관점을 말하는데 다름을 보지않고 틀림만 주장한다.
둘 다 맞는데, 틀리지도 않았는데 자기 입장에서만 악쓰고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의 관점으로 가서 그의 시선으로 한 번쯤 바라보는 공존이 소통에서는 필요하다. 경청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 하는 호응, 추임새면 더 좋겠다는 아량을 베푸는 소통 자세로 바꾸어보자!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학식과 경륜이 높아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누구나 이성적이 못하다. 감정이 앞서고 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한다. 앞과 뒤만 있을 뿐 절대로 좌우 옆이 없는 이분법적 소통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소통의 방법은 절대로 전투가 되어서는 안된다. 적을 죽이고 이겨야 하는 전쟁 같은 목표가 아니라 나와 다른 상대와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설득하는 것이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리나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성간의 교류가 바로 소통의 목적이고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이분법적 논리에 익숙해져 있다.
추임새는 판소리나 민요 등 국악 공연에서 소리꾼의 흥을 돋우고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고수나 청중이 중간에 넣는 감탄사나 소리이다. '추어주다', '칭찬해 주다'라는 '추임'에 모양을 뜻하는 접미사 '-새'가 붙은 말로 소리꾼과 청중이 소통하며 공연의 흥과 신명을 함께 만들어가는 멋진 요소이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서 내 뜻과 조금 달라도 “얼씨구!, 좋다~ “같은 추임새를 만들어 한다면 상대의 태도도 바뀌어 맞장구 정도는 쳐주지 않을까?
오늘부터 “얼씨구~ 좋오타~”의 ‘추임새 커뮤니케이션’을 제안해 본다. 처음부터 이게 남사스럽다면 “진짜요?”, “정말? 대박~” 등으로 곰살맞게 시도해 보자. 요즘 세상 어디를 봐도 너무 살벌하다. SNS에 상대 뜻과 다른 댓글을 올리면 쌍소리와 악플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이제 우리네 문화에서 사색당파니 사색당쟁이니 하는 소통문화를 사라지게 해야한다.
눈으로 말하고, 추임새로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어 보자. 말로만 소통하려 하지 말고 마음(진정)으로…


